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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엘리자베스 하드윅 지음, 임슬애 옮김
- 출판사코호북스(cohobooks)
- 출판일2023-07-13
- 등록일2024-10-22
- 파일포맷epub
- 파일크기4 M
- 지원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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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기존 관념을 뒤엎다
“플롯을 원하면 댈러스(70년대 미국 인기 드라마)를 보겠다.” 엘리자베스 하드윅이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잠 못 드는 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전형적인 플롯의 부재다. 기억과 사유, 상상, 인용문, 편지 등이 조각조각 모여 콜라주를 이루며 화자의 삶과 주제를 드러내는 이 작품은 로렌 그로프가 서평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소설보다는 한 곡의 음악을 상기한다. 같은 인터뷰에서 하드윅은 『잠 못 드는 밤』의 구상은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이제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화자를 ‘나’라고 부를지 ‘그’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하드윅은 결국 ‘나’를 택하고 화자에게 자신의 이름 엘리자베스를 붙이는데, 이것은 화자가 ‘나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나의 언어로 자유롭게 회고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삼인칭시점으로 쓰였지만 저자의 이야기라는 것이 분명한 소설들과 전혀 다른 접근인 것이다. 이 작품은 소설이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에세이, 산문시, 메모어 등 다양한 장르와 접목되면 문학의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워질수 있는지 보여준다.
기억이라는 허상에 삶의 정수를 담아내다.
소설 도입부에서 화자는 기억을 과제로 삼아 이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고 결심한다. 기억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지만 변하고 편집되고 왜곡되는 허상이다. 그런데 이 허상은 바로 우리가 이해하는 지금까지의 삶이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의 기반이 되고 현재와 미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자가 말한 대로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나가려면 그에 앞서 이 허상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억을 돌이켜볼 것인가? 화자는 “선반에서 캔을 꺼내듯”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바로 다음 순간 의미심장한 단어 ‘아마도’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으며, 우연히 길에서 주워들은 한마디가 수차례 되풀이한 대화보다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어떤 기억이 ‘사소’하고 ‘중요’한지는 결국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마치 관찰자처럼 감상이 배제된 투명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지 그것의 사실 여부를 밝히려들지 않는다. “때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쥐고 있는 내 삶의 어휘집이, 사실관계의 색인이 끔찍하다. 다들 여벌의 쌍안경처럼 꼭 쥐고 있다. 그러니까, 사실이 내 기억을 방해한다는 말이다.” 화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기억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기억 그 자체인 것이다. 현재의 엘리자베스가 과거의 엘리자베스가 관찰한 바를 새로이 관찰하는 것이며, 저자와 화자의 시선과 목소리가 하나로 녹아든 이야기 속에서 독자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상실에 대한 애도라는, 삶의 정수를 체험한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상실에 대한 애도
『잠 못 드는 밤』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화자가 자신이 회상하는 인물들에게 보이는 깊은 연민과 공감이다. 화자가 기억하는 대상은 대부분 여성인데, 각자 자기만의 불행을 안고 처절히 살아간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매춘을 하다가 지독한 염증과 통증으로 죽은 이웃 아가씨. 불도저처럼 밀어닥친 가난에 모든 것을 잃은 동네 음악 선생, 학대의 기억과 질병을 안고 사는 조젯, 살아 있으니 다른 사람의 빨래를 해주고 있을 것이 분명한 아이다. “그저 늙어 낙오한 소처럼, 그 누구의 부양도 없이, 끔찍한 자유 속에서 방황”하는 여자들. 비운의 스타 빌리 홀리데이를 제외하면 이들은 화자가 기억해주지 않았으면 세상에 자취를 남기지 못했을 여자들이다. 이들을 기억하기로 한 화자의 ‘결정’을 통해, 또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독자는 엘리자베스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하고 이해한다. “어쩌면 여기서 시작된 걸까, 반복되는 실수와 나태의 희생자를 향한 호기심 섞인 연민은.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 생, 연처럼 부드럽고 천천히 낙하하는, 아니 격렬한 추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는 생을 향한 연민은.”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하드윅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 소설의 화자는 관찰하는 사람입니다. 관찰하기로 결정한 대상을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처절하게 살아가는 거리의 망가진 여자들, 청소부, 미드타운 호텔의 한량들 등 온갖 종류의 패배자들과 무의식적으로 공감한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 나는 저들과 다름없다고.” 그들의 상실과 고독과 처절함에 보이는 연민은 결국 엘리자베스 자신의 삶으로 귀결된다. 한 사람의 삶은 다른 삶과의 연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법이고, 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 『잠 못 드는 밤』은 아끼는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은 소망으로 끝난다.
크나큰 상실 뒤에 글로써 되찾은 자신의 삶
『잠 못 드는 밤』이 출간된 1979년은 엘리자베스 하드윅과 로버트 로웰이 이혼한 지 7년, 로웰이 사망한 지 2년째 되던 해다. 양극성장애가 있던 로웰은 두 사람이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으며 그 후로도 거의 매년 정신증을 앓았다. 특히나 그의 조증은 새로운 여성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켜서, 그는 여러 차례 불륜을 저지르고 가정을 소홀히 하여 결혼을 위기로 몰아갔다. 그때마다 하드윅은 살림과 아이의 양육 등 결혼생활의 부담을 홀로 짊어지고 꿋꿋이 인내했다. 그러나 1970년 로웰은 기네스 가문의 상속녀이자 화가 루치안 프로이트의 전처이자 뮤즈로 유명한 작가 캐럴라인 블랙우드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끝내 이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3년, 로웰은 『돌고래 The Dolphin』라는 시집을 출간하는데, 이 시집에는 이혼 당시 하드윅이 보낸 편지와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이 인용되어 있었다. 로웰은 두 사람의 사적인 대화 내용을 허가 없이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적 의도에 맞추어 멋대로 편집했다. 이 사건은 문단에 큰 스캔들을 일으켰고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과 에이드리언 리치 등 부부의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문인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드윅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사적인 삶과 은밀한 감정이 세상의 눈앞에 공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 가장 친밀했던 사람의 펜 끝에서 실제와 다르게 변조된 것이다. 『돌고래』의 출판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드윅은 “문학의 역사를 통틀어 한 사람이 살아생전에 실명으로 소위 창작이라는 행위에 이렇게 이용된 적은 없다.”고 항의했다. 시인으로서 로웰의 재능을 높이 산 하드윅은 어쩌면 그의 명성을 지켜주기 위해 그를 공공연히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주고받은 서신과 대화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밝혔다. 그렇지만 이혼 후에도 하드윅은 딸이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애썼으며 로웰에게 끝까지 헌신적인 친구로 남아주었다. 1977년 로웰은 JFK공항에서 하드윅의 뉴욕 아파트로 오는 길에 택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로웰이 죽고 2년 뒤에 출간된 『잠 못 드는 밤』은 로웰의 시집 『돌고래』와 마찬가지로 실제 삶과 예술의 관계를 연구하지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하드윅은 실제 인물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편집하는 대신, 화자와 저자의 구분을 흐리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강조함으로써 삶과 소설의 경계를 허문다. 또한 그는 로웰과 같은 방식으로 앙갚음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잠 못 드는 밤』이 출간되기 전에 이에 수록된 빌리 홀리데이에 대한 부분을 먼저 읽은 로웰은 하드윅이 집필 중인 작품이 자서전과 비슷하지만 형식이 놀랄 정도로 실험적이라며 자신에 대한 어떤 내용도 포함시켜도 된다고 말했는데, 막상 출간된 작품에서 로웰의 존재는 희미하기 그지없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 ‘그’의 안부에 대한 내용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몇 마디 실려 있을 뿐이다. 또한 그를 잃은 상실과 오랜 결혼생활의 파탄은 “홀로 이곳 뉴욕에 있는 나. 이제 우리는 없다.”라는 문장으로 담담히 표현되어 있다. “내가 가벼운 어조를 시도했던 문장들, 그중에는 나를 아이처럼 흐느끼게 했던 사건, 격변, 파괴를 담고 있는 것이 많지.“라는 구절에 그가 겪은 아픔이 통렬히 함축되어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아픔마저 끌어안는다.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바라봄을 축하하고 흘러내리는 시간의 물길에 섞여 땅으로 녹아내리며 고마운 마음을 품는다. 이는 마치 그 모든 슬픔과 기쁨, 상실과 애착이 깃들어 있는 자신의 삶에서 로웰과의 관계는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타인의 펜 끝에서 뒤틀리고 변해버린 자기 모습을 기억의 조각을 모아 새롭게 다시 빚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