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상세보기

백범일지 - 책 읽어드립니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커버이미지)
알라딘
백범일지 - 책 읽어드립니다,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 평점평점점평가없음
  • 저자김구 지음 
  • 출판사스타북스 
  • 출판일2020-08-30 
보유 1, 대출 0, 예약 0, 누적대출 0, 누적예약 0

책소개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 선생의 치열한 삶의 기록

가장 쉽게 풀어쓰고 읽기 편하게 편집된 NEW EDIT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


대한민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이 소원이셨던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는 그분의 자서전이자 유서이다. 또한 그 암울했던 시대에도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독립운동을 펼치시며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에 매진하신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기도 하다.
평범한 사람들 누구라도 자신만큼 애국심을 갖는다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선생의 신념과 평생 이를 실천하며 민족의 독립에 헌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김구 선생의 질풍노도와 파란만장의 젊은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의 어린 시절부터 질풍노도의 청년기, 망국의 시련과 중국으로의 망명,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해방 후 귀국까지 파란만장했던 삶과 더불어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담겼다.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지도자로 평생 헌신했던 선생의 기록은 민족 지도자 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펼쳤던 민족운동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책은 김구 선생의 호가 의미하듯이 백정과 범부의 마음으로 썼다고 했다. 『백범일지』에는 김구 선생이 스스로 말했듯이 ‘못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간 본인의 삶을 통해, 누구나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백범 선생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철학을 평생 실천했던 행동들이 선생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득 채워져 있기에 독자의 감동이 클 수밖에 없다.

그토록 자주독립을 바라시던 겨레의 큰 스승 그 감동의 기록!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느님이 물으시면,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동시에 선생이 자신의 인생과 독립운동의 과정을 알리기 위해 남긴 유서라고도 할 수 있다. 상권은 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임시정부 시절 두 아들에게, 하권은 중일전쟁의 결과로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을 때 동포들에게 선생의 삶과 민족운동에 대한 소회를 밝히려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의 생생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동포들을 향한 외침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직접 남긴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백범일지』는 이러한 역사적 가치 때문에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꼽히고 『백범일지』가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바로 선생의 뜨거운 민족애 때문일 것이다.

저자소개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

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목차

백범의 출간사



I. 백범일지 상권



인, 신 두 어린 아들에게



1. 나의 어린 시절

조상과 가문의 내력

난산 끝에 태어난 나

배움의 시작



2. 시련의 젊은 날

타락으로 얼룩진 과거

신비한 동학의 세계로

팔봉접주 김창수

청계동의 안 진사



3. 질풍노도의 시절

청나라를 향하여

김이언의 의병

스승의 손자사위가 된 나

길고도 험한 방랑 길



4. 첫 번째 투옥과 탈옥

첫 번째 체포와 모진 고문

신문이 아닌 김구의 호령

새롭게 깨달은 서양 문물

삶과 죽음의 길목

강화의 큰 인물 김주경

어쩔 수 없는 탈옥



5. 방랑과 유람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팔도강산 유람과 삼남 견문

마곡사에서 원종으로 입적

환속과 견문 그리고 김구



6. 소중한 이들과의 사별

아버지와 스승의 죽음

약혼한 여옥의 죽음

신교육자의 자유결혼



7. 민족을 위한 계몽운동

을사조약과 항일투쟁

다시 신교육과 계몽운동

안중근 의거와 김구의 항일 투옥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



8. 모질고 처참한 독립운동가들

안창호의 신민회 조직

신문이 아닌 고문 또 고문

고문보다 더한 회유

조작된 신문과 재판



9. 끝내 실행하지 못한 자살

강도사건 15년 보안법 2년

변하지 않는 도적들의 법

몽우리돌대 백범 김구

가출옥과 딸의 죽음



10. 상해서 시작된 임시정부

동산평의 농촌계몽운동

상해의 임시정부 조직

아내의 죽음



II. 백범일지 하권



하권의 책머리에



1. 삼일운동과 상해 임시정부

임시정부 경무국장

득실거리는 왜놈 앞잡이

반목과 갈등의 사상대립

세파로 분리된 한인 공산당



2. 이봉창의 일황 폭탄 저격

일본의 만주국 선언

줄어든 독립운동가

이봉창의 일황 저격

상해의 중일 전쟁



3. 윤봉길 의거와 진상공개

윤봉길의 거사 준비

토굴속의 폭발시험

의거의 진상을 백일하에 공개



4. 또다시 피신과 유랑의 세월

호수가 있는 가흥의 은신처

여행지 같은 도피처

뱃사공 주애보

남경의 암살대



5. 암살과 어머니의 추억

중경으로 옮긴 중국 정부

목숨을 노린 암살자

빈궁하게 사는 묘족들

끝내 손쓰지 못한 어머니의 병



6. 중경의 한국광복군 창설

광복군의 조직

미군과 광복군의 비밀훈련

광복이다! 광복!!

중경생활의 추억



7. 광복된 조국 품으로

고국의 환영 행진

인천감옥 그리고 마곡사의 회상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골봉안식

삼남지방 순회 길의 추억



III. 나의 소원

1. 민족 국가

2. 정치 이념

3.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백범 연보

한줄 서평